Home >

도망자 - 이현승

2007.10.17 17:58

윤성택 조회 수:1101 추천:114

『아이스크림과 늑대』 / 이현승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랜덤하우스》(2007)


        도망자

        나는 사라지는 자
        삼투되는 것들의 친구
        휘발되는 모든 것들의 아버지.

        뜨거운 대지의 날숨과 담배 연기가 뒤섞이듯
        우리는 서로 다른 출구에서 나왔지만
        같은 입구를 향해 달려갑니다.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벽지 무늬처럼
        우리는 언제라도 결합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나는 어두운 저녁의 그림자
        당신의 시야 뒤편으로 흐르는 자
        나는 태양의 반대자로서
        태양을 등지고 잎맥 속으로 스미듯이
        모든 비밀의 목격자로서
        나는 대지의 날숨에 담배 연기가 뒤섞이듯이.

        바보는 천재의 은신처
        평범함을 가장해서 우리는 안부를 나눕니다.
        이로서 다시금 불만은 사라졌어요.
        신문에는 물타기에 대한 의혹이.
        나는 유령처럼 활보하는 자
        나는 햇빛, 나는 수증기, 나는 물방울.
        비로소 당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감상]
도망치는 것은 멀리 달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시에서는 <삼투>되는 것이군요. 오히려 내부로 흡수되기도 하고, 날숨과 연기처럼 <뒤섞이기>도 합니다. 이는 도망자의 심리나 추격자의 심리가 서로 연결된 데에서 발견되는 통찰입니다. 도망자는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추격자의 심리를 생각하고, 추격자는 포위망을 좁혀가기 위해 도망자의 심리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서로 속고 속이는 일련의 행위들이 정치의 <물타기>가 되기도 하고, 천재가 <바보>로 은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도망자란 스스로의 심리 중심에 그늘진 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과감하게 사물의 묘사를 생략하고 관념의 징후들만으로 완성된 단단한 시편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91 캣츠 - 전기철 [1] 2004.01.19 1094 182
990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989 허불허불한 - 김언희 2002.02.15 1096 177
988 징글벨 징글벨, 겨울비는 내리고 - 최금진 2002.12.16 1096 172
987 그녀의 염전 - 김선우 2003.05.02 1096 173
986 봄 꽃나무 아래 서면 - 권현형 2003.05.09 1097 178
985 형상기억합금 - 이혜진 2002.07.16 1098 202
984 미탄에서 영월사이 - 박세현 2001.11.08 1099 188
983 물고기 여자와의 사랑1 - 김왕노 2003.01.13 1099 193
982 11월의 밤 - 서지월 2002.12.01 1101 186
» 도망자 - 이현승 2007.10.17 1101 114
980 홍예 - 위선환 2004.01.12 1102 223
979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수련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2002.01.30 1103 199
978 고려장 2 - 정병근 2004.12.23 1104 197
977 달빛 세탁소 - 최을원 2002.11.25 1105 194
976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2004.11.08 1105 170
975 강 건너 불빛 - 이덕규 2009.03.02 1107 101
974 도시생활 - 설동원 [1] 2003.12.18 1108 182
973 겨울잠행 - 손순미 2003.02.07 1110 178
972 낡은 사진첩을 보다가 - 권영준 2003.06.27 1110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