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최갑수/ 《단 한 번의 사랑》, 문학동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아주 짧았던 순간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봄날이었다, 나는
창 밖을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개나리 꽃망울들이
햇빛 속으로 막 터져나오려 할 때였던가
햇빛들이 개나리 꽃망울들을 들쑤셔
같이 놀자고, 차나 한잔 하자고
그 짧았던 순간 동안 나는 그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여자를 사랑해왔던 것처럼
햇빛이 개나리 여린 꽃망울을 살짝 뒤집어
개나리의 노란 속살을 엿보려는 순간
그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어서
그후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몇 명의 여자들이 계절처럼 내 곁에 머물다 갔지만
아직까지 나는 그 여자를 못 잊어
개나리꽃이 피어나던 그 무렵을 나는 못 잊어
그 봄날 그 순간처럼
오랫동안 창 밖을 내다보곤 하는 것인데
개나리꽃이 피어도
그 여자는 지나가지 않는다
개나리꽃이 다 떨어져도
내 흐린 창가에는 봄이 올 줄 모른다
* 크지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감상]
토요일은 청바지가 어울립니다. 그리고 추억에도 토요일 같은 청춘이 있겠지요.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의 옷차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진 아련한 이미지 같은 거. 복잡하고 신산스러운 일상 속에서 도무지 눈물 한번 나지 않는 건조한 나날. 사람들은 극장으로 울러 들어가고, 죽은 가수는 책을 접어놓고 흐린 하늘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고, 어떡하죠 내 심장이 고장났나봐 그녀의 노래가 초콜릿이 되기도 하는 날. 편지처럼, 흐린 하늘 아래 감상적으로 이 시를 다시 읽습니다. 우리는 몇 번의 계절을 지나왔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