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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났다 - 김연성

2006.06.27 16:53

윤성택 조회 수:1662 추천:266

<발령났다> / 김연성/ 《미네르바》 2006년 여름호


        발령났다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가듯이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1시,
        골목 끝에 잠복해있던
        검은 바람이 천천히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감상]
직장인의 비애 같은 거랄까요. 이 시를 읽으니 우리네 삶이 종이 한 장의 행방에 달려 있다는 서글픔으로 전해집니다. 이력서나 경력증명서 이런 서류 따위가 사람보다 먼저 평가되고 또 그렇게 종종 운명을 바꿔 놓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구로 이뤄진 <타협>과 <원칙>의 직관은 우직한 선서 같습니다. 더불어 사회생활에서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서 더 나아가 <저 세상>과 <미래>로 확장되는 의미도 이 시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군요. 회사에 <발령>이 이뤄지게 되면 부산하게 술자리가 이어지겠지요. 누구는 승진하고 누구는 낙담하고… 새벽골목에서 토악질해 놓은 건, 채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의 덩어리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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