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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 - 한정화

2002.03.27 14:42

윤성택 조회 수:1281 추천:184

제1회 포엠토피아 신춘문예 당선작/ 한정화



         유통기한    
            

        오겠다고 약속한 날까지 오지 않는 사람을
        그래도 기다리는 나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은 독을 품는다
        헛된 약속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썩어질 줄을 알았던
        자인 또는 자조의 독

        그러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유통기한이 지난 후에야 기억해낸 것들은
        미련 없이 버릴 일이다, 버려지는 것들의
        향기롭던 한때가 그대 손끝에
        오래 머무를지라도

        흘러 통하는 것, 그게 어디
        사람들에게서 뿐이랴
        꽃과 바람 파란 이파리와 빗물 따사로운
        햇살과 이마 새와 나뭇가지 아, 봄날의 유통은
        약속 없이도 살갑기만 하여라

        내게 다시
        그대를 만나고 헤어지는 날이 온다면
        또 기다려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유통기한이 아주 긴, 한 삼십 년 남은 반생쯤 되는
        그 무엇이면 좋겠다


[감상]
유통기한을 시의 소재로 삼아 풀어낸 솜씨가 좋습니다. 그리고 화자의 희망에 대한 것인 마지막 연 처리 또한 그렇고요. 어쩌면 우리의 몸도 생명이라는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육체가 소멸되기까지 영혼을 담아내다가 유통기한이 지나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언젠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에 의한 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대상에 대한 호르몬 반응의 평균 기간이 한 3년 된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니까 믿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도 유통기한이 3년이라는 과학적인 수치가 제공된 셈인데요. 글쎄요, 무언가 끊임없이 새로운 면을 발견해내고, 그리고 자신이 또한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면 사랑의 유통기한 또한 평생으로 늘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시를 사랑하는 바로 당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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