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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 반의 기적 - 김명인

2002.03.29 14:30

윤성택 조회 수:1179 추천:183

17시 반의 기적/ 김명인/ 2001 『문학판』겨울 창간호


        17시 반의 기적    
 
        오후 다섯 시 반의 기적 속으로
        기차가 멎고 승객 몇이 내려서자
        날리는 꽃잎도 없이 무궁화호
        줄기째 산모퉁이로 꺾어진다.
        새삼스러운 기적이라니, 이제 떠난 열차는
        기다림을 남기지 않는다.
        올 데까지 와버린 길 끝인 듯
        몇 달째 유폐되었던지, 건너편 컨테이너를
        마침 저 생생한 기중기가
        커다란 쇠 젓가락으로 화차의 빈 좌대 위에 가볍게
        들어 얹을 때, 비로소 저들 아득한 이주 너머로
        오래된 일상이 농담처럼 무너지지만
        어떤 기다림은 그렇더라도 마침내 어긋나는
        철길의 약속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길로 자진해서 왔다.
        그렇고 그런 다짐과 들끓는 후회 사이로
        아직도 끌고 가야 할 길들 등뒤에 남아 있지만
        정거 없이 방금 스쳐간 특급이나
        하릴없이 두리번거릴 완행의 지체를
        한낮도 다 기운 지금 돌려세우자는 것은 아니었다.
        철길을 녹여 바꾸고 싶은 숙명이 있었다 해도
        강철이 기차로 기억되지 않듯이
        다만 엇갈리듯 스쳐가면서 나는
        더 이상 솔직할 수 있을는지.
        조치원! 중얼거릴 때 저 역사의 파도지붕에서 날아들어
        망설이듯 승강장 위로 슬며시 날개를 접는
        한 떼의 비둘기, 나도 우연처럼 떠올릴 것이다.
        모든 하루라면 스스로 저버리는 석양조차
        건너편 아파트의 유리들이 되받으면
        그런 순간에도 반복되지 않는 장엄이 있고 순식간에
        세상이 환해지기도 하는 것을.
        오지 않던 열차가 느닷없이 역사 안으로
        천천히, 천천히 기적처럼 들어서리라.
        아직도 늦지 않았다. 어떤 기다림 때문에
        오후 다섯 시 반의 영원,
        여기 멎거나 다시 떠난다.



[감상]
글자의 홈에 생각을 끼워 넣으며, 활자가 이끄는 대로 이 시의 길을 달리는 동안 내내 짠해집니다. "날리는 꽃잎도 없이 무궁화호 줄기째 산모퉁이로 꺾어진다"의 이 표현에 마음은 막 울림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기다림이 기적이 되기까지 레일은 건강한 팔뚝을 내어낼 것입니다. 분명 "나는 이 길로 자진해서 왔다"고, 박하사탕의 과거로 가는 기차가 천천히 천천히 당신을 만났던 처음 그 순간으로 이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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