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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여인숙에서1 - 윤이나

2002.03.30 11:34

윤성택 조회 수:1228 추천:177

국도 여인숙에서1/ 윤이나/ 『현대시문학』2002 봄호


        국도 여인숙에서1    
            

        도로변의 끝이 단정치 못하다
        전봇대에 흘려놓은 오줌줄기를 따라 발걸음을 돌린다
        한숨소리로 낮아진 담벼락에 걸린 흑백사진 같은 낡은 간판들
        샷시문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참 오래간만이다
        부스스한 여자가 창문을 민다, 혼자시유?
        그렇다 하지만 여자는 두 개가 든 칫솔 봉지를 준다
        이곳은 둘만의 은밀한 장소인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오래된 카펫 틈 사이로
        손을 뻗는 그림자들 무심히 지나치다 밟아 버린다
        아, 뼈 속으로 파고드는 이 옅은 비명소리
        좁다란 복도 공동 화장실 옆 208호의 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들었다
        에스콰이어 로고의 마지막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오 년 전 건설회사 과장으로 일할 때 보너스로 받은
        십 오 만원 짜리 소가죽 구두
        불에 얹어 구워 먹고 싶다
        반질반질한 기름이 줄줄 흐르기를 기다리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기만 하던
        그 시절 그 <암소갈비집>
        담배를 피고 싶어 골목에서 꽁초 몇 개를 주워왔다
        똑. 똑. 똑.
        40대 후반의 아까 그 여자, 생수 병 두 개를 들고 서 있다
        범하고 싶다
        가슴께 까지 떨어진 레이온 셔츠 안으로
        허옇게 지는 목련 두 송이가 이빨을 드러낸다
        여자를 취해 본 적이 언제였나
        침을 깊게 삼키고 문을 닫아버렸다
        입이 마른다
        여자가 발치에 놓고 간 저 생수병
        휴...물 속으로 뛰어 들고 싶다, 숨을 쉬고 싶다
        천장 아래에 있는 손바닥만한 창을 열자
        바람이 벽지에 붙어있던 곰팡이 꽃을
        모조리 휘감고 사라진다
        건성건성 감쳐진 이불의 무늬들도 뒤늦게
        바람에 몸을 싣는다
        텅 빈 이불 위 나르다만 꽃 잎 하나만
        처연하다




[감상]
한 사내가 막 국도여인숙에 투숙합니다. 그리고 사내의 단편적인 기억을 쫓아가며 이 시는 호흡합니다. 오르는 계단에서 "뼈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화자 내면의 고독으로 어떻게 전이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하고요. 허름한 세월만큼 누군가 하룻밤의 사랑을 나눴을 꽃무늬 이불, 얼마나 많은 사랑이 이곳에서 쓸쓸히 몸을 지폈을까. 어쩌면 "숨을 쉬"고 싶은 것은 국도여인숙에 묵고간 이름 없는 사랑들일지도 모릅니다. 여인숙 주인여자의 브레지어를 "허옇게 지는 목련 두 송이가 이빨을 드러낸다"는 표현이나, "에스콰이어""구두"에서 "암소갈비집"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비유나, 바람이 "텅 빈 이불 위 나르다만 꽃 잎"이나 곳곳에 잔잔하고 참신한 시인의 숨결이 숨어 있습니다. 94년도 겨울쯤이었나요. 혼자서 동해안을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찻값이 싼 다방에서 글을 정리할 것. 여관보다 여인숙에 투숙할 것. 혼자 마시는 술은 맥주보다 소주로 할 것. 몇 가지 생각들을 정하고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춘천으로 속초로 묵호로 무작정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군대를 가야했으므로 국방부에 2년여의 내 청춘을 저당 잡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마지막 도피였습니다. 부산 터미널 근처에서 앓았던 몸살,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다짐했던 그때. 이 시의 사내를 그때 쯤 마주쳤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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