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2003.11.12 13:29

윤성택 조회 수:1163 추천:157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창작과비평사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감상]
독특한 목소리입니다. 복숭아 꽃 흩날리는 풍경에서 내뱉는 발설마다 생각의 깊이가 물씬 느껴집니다. 죄를 무릅쓰고서라도 그대와 살고 싶은 색(色)을 탐하겠다는 의지는 이 시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 충분하고요. 요즘 폐쇄적인 자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여성시들에 비한다면 한결 적극적인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강원도 문막에 살고 있을 시인, 그가 대면하고 있는 자연은 또 어떤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었는지 시집을 좀더 들여다봐야겠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91 20세기 응접실 - 윤성학 2007.06.05 1129 155
990 봄날 - 김기택 2003.05.19 1355 156
989 밤 막차는 왜 동쪽으로 달리는가 - 김추인 2003.10.21 959 156
988 수전증 - 박홍점 [1] 2007.01.24 1184 156
987 더딘 사랑 - 이정록 2003.04.14 1267 157
986 실종 - 한용국 2003.06.02 1027 157
»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2003.11.12 1163 157
984 암호 - 구순희 2004.04.28 1205 157
983 목련 - 심언주 2007.04.05 1440 157
982 산수유 아래서 징소리를 - 김길나 2007.06.16 1195 157
981 기도와 마음 - 이지엽 2008.03.24 1738 157
980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979 밤 골목 - 이병률 2002.11.12 1062 158
978 여자의 육체 - 이성복 2002.12.27 1335 158
977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964 158
976 때늦은 점심 - 이지현 [1] 2003.04.02 1055 158
975 불타는 그네 - 신영배 [1] 2007.05.08 1242 158
974 사랑 - 김요일 2011.04.04 2461 158
973 범일동 블루스 - 손택수 [1] 2003.02.14 1296 159
972 인생 - 박용하 [2] 2003.10.10 1857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