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구순희/ 198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암호
--점.4
처음 본 그의 손끝에는
굳은살 하나 없는 더듬이가 있다
방금 피아노 건반을 빠져나온 듯한 가늘고 긴 손가락
모래바람 이는 사막의 구릉을 넘어가는 중인지
가끔씩 손끝이 찔리는지 움찔하다가
발기 직전의 꽃
가만, 그가 열고 가는 꽃의 심지를 꾹 눌러 보았다
그의 손가락은 꽃의 중심에 있고
몰래 짚은 내 손가락은 겨우 꽃잎만 살짝 건드렸을 뿐
한아름 다발로 받는다 해도
무슨 꽃이 어떻게 피었는지 알 수가 없다
눈뜨고도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그는 눈감고도 훤히 아는지
입술 끝에 웃음꽃이 일순 피었다 사라진다
[감상]
읽을수록 재미있는 시입니다. 2연 첫행 때문에 암호처럼 묻어두었던 곳곳의 비유들이 남자의 그것으로 상징화되고 있음을 짐작해봅니다. 매끈한 손끝의 ‘더듬이’, 여체를 닮은 ‘사막의 구릉’, 두 개의 중심이 잡혀 있는 ‘꽃의 심지’, 그리고 ‘몰래 짚은’ 그녀의 터치, 별개로 읽히는 ‘입술’의 의미까지. 좋은 시는 상상력을 열어줄 뿐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제각각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눈 감고 느끼는 것, 꽃은 절정에서 피었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