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박성우 / 시집 『거미』(2002, 창작과비평사)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1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분비물을 흘리는 것은, 배춧잎에 붙어 있는 솜털이
내겐 덤불이기 때문이다
2
사내가 집을 나선다 저 사내는 볕을 두려워하는 달팽이다 다행히 오늘
은 햇살이 비춰지지 않는다 아니 이젠 비춰진다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사내에겐 꽃상추밭 같은 공원이 생겼으니까, 실직한 저 사내의 딱딱한
집 속에는 물렁물렁한 아내가 산다 건들기만 하면 젖무덤이 금세 봉긋해
지는 그녀는 하루종일 통조림용 마늘을 깐다 그런 이유로 사내의 눈이
매웠을까 사내가 눈을 훔치며 지나간 골목이 축축하다
[감상]
우렁이 색시가 생각나네요. 달팽이에 대한 정조가 어쩐지 삶의 애잔함으로 와닿습니다. 이번 신작 시집에 나온 시입니다. 일찍이 신춘문예"거미"에서부터 줄곤 지켜본 시인였는데 반가운 소식입니다. 삶의 진솔함을 맛보고 싶다면 기꺼이 서재의 책꽂이로 초대하고 싶은 시집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