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번째 사내》/ 이영주/ 《문학동네》시인선 (근간)
나쁜 피
화면을 켜면
내 속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피
고압전류에 휩싸인 그가
긴 담벼락을 질주하네
몸 속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네
컬러바 전자기호가 우르르 쏟아지네
나는 깊은 곳에 그를 수혈하네 화면을 켜면
나는 고아다
너를 키운 것은 기호였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터질 것 같은 전선의 미로 속으로 흘러들었다 뜨거운 전선줄이 아버지의 목을 동여맸다 너는 기호의 아버지를 만났다 투명한 꽃잎을 본 것도 기호의 해독코드가 가동되면서부터였다 추억의 흐릿한 빛으로 사라진 아버지를 화면 밖에 파묻고 너는 새로운 플러그를 꽂았다 너는 고아였고 네 몸은 나쁜 피로 가득 차올랐다 점점 네 머리를 덥히는 아름다운 피
그와 뒤엉켜 이제 나는 밑으로 가라앉네
그가 더듬을 때마다 축축하게 젖어오는 자궁의 일련번호들
방 안 가득 넘실대는 새로운 종족의 사생아들
나는 황홀한 피 속에 잠기네
[감상]
우리 삶에 있어 <전자기호>는 어느덧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핸드폰, 전화, TV, 인터넷 등등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교육과 문화에 침투해 있습니다. 작금의 이러한 현실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나>를 전자기호로 수혈된 <고아>나 고압전류인 <그>와의 관계를 맺는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투영해냅니다. 그리하여 진짜 아버지를 여의게 하고, 새로운 <기호의 아버지>가 <플러그를 꽂>고 양분을 주입해 먹여 살립니다. 모체와 태아가 기호화되면서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심리의 착란은, <새로운 피>에서 <나쁜 피>로, <아름다운 피>, <황홀한 피>로 점차 잠깁니다. 중요한 것은 제목이 말해주듯 <나쁜 피>라고 인식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있겠지요. <깊은 슬픔과 절망의 체온을 숨>긴 시인의 시를 <일종의 심리극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라는 뒷표지의 글에 눈길이 머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