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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 - 조영석

2006.12.26 16:50

윤성택 조회 수:1329 추천:171

《선명한 유령》/ 조영석/ 《실천문학》시인선(신간)


        살얼음

        몇 년째 물을 품고 있는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던 물의 거죽이
        주름진 채 굳는다. 이빨이 없는 거대한 아가리에
        발을 얹는 곳마다 거미줄이 퍼져나간다.
        얼음 속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이 흐른다.
        흐르면서 얼음 바깥을 염탐한다. 가벼운 먹이는
        그대로 놓아주고 한 번에 먹어치울 큰 놈을
        조용히 기다린다. 저수지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살얼음은 물의 덫. 해마다 한 명씩은 꼭
        끌고 들어가고야 마는, 네발짐승은 절대 걸리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살얼음이 기승을 부리는 때
        결코 저수지에 가지 않는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얼음은 조금씩 두꺼워지며 아이들을 부른다. 밤마다
        굶주림에 쿨럭이는 물소리가 마을을 휘감는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쓴 채 잠을 설치고 어른들은
        밤새 물을 밝혀 얼음의 아가리를 살핀다.
        살얼음은 그러나, 기어코 한 번은 먹이를 끌고 들어간다.
        제 분을 못 이겨 속으로부터 꽝꽝 얼어붙기 전에.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는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
        저수지에는 종일 진눈깨비가 날리고,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놓고 울음 없는 위령제를 지낸다.
        해마다 한 번씩은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감상]
마을 저수지를 육식성의 괴물로 비유하는 상상력이 인상 깊은 시입니다. 겨울이 되면서 저수지에는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그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고 싶어 밤잠을 설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저수지는 단단한 얼음 빙판 어딘가에 살얼음의 덫을 놓아 <기어코 한 번은 먹이를 끌고>가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얼음이 어는 환경과 마을의 위령제 등 현실적이고 분석적인 토대 위 시인의 직관은 <밤마다/ 굶주림에 쿨럭이는 물소리>로 섬뜩한 동화를 엮어갑니다. 마침 기대하고 기다리던 젊은 시인의 시집이어서, 야금야금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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