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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팽이처럼 - 김광규

2007.02.02 10:35

윤성택 조회 수:1310 추천:172


<좀팽이처럼>/ 김광규/ 《현대시》 2006년 2월호, <젊은 시인들의 중견 시인 읽기>게재

        좀팽이처럼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감상]
환청처럼 들리는, 좀팽이. 이 시가 씌어진 80년대 후반이나 그 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나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사회 양극화, 부동산 투기 등 작금의 이 사회는 아직도 병을 앓고 있고 그 열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이 된 표정을 애써 감추듯 이렇게 우리는 좀팽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김광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삶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달콤한 위안이 아니라 쓰디 쓴 환멸 같은 것이었다.” 가끔씩 60년대에서 80년대 발표된 이런 시를 접할 때마다 그 치열한 궤적을 뚫고 온 시인들에게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아마도 요즘의 시들이 간과하고 있는 절실함과 진정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김광규 시인의 시편들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에서 의미를 포착하고 거기에서 확장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힘이 있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은, 은행에서 부동산으로 대출을 받고 그 대출된 돈으로 다시 땅을 사고 파는 졸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마치 카메라의 앵글처럼 그 졸부의 땅에서 아래로 아래로 적나라하게 내려간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이렇게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신촌의 거리가, 서울이, 대한민국이, 아시아가 그리고 지구가 느껴지고, 천 만 인구의 서울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우리네 세상살이가 낯설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질문에 화들짝 데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좋은 시는 시대가 변해도 그 의미와 깊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1980년대의 현실이 2007년에 와서도 뜨겁게 읽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과 함께 살아야할 지구라는 땅덩어리가 투기 대상이 되고, 여전히 착취와 수탈을 거듭하는 자본주의 폭력성 앞에 ‘좀팽이’로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가 나이거나 당신이거나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외면하고 싶은 것이 정치이고 사회이고 현실이다. 그래서 적잖은 젊은 시인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발길을 돌려 자기 내부로 들어가 상상과 환상에 기거하는 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대한 경험은 점점 사소해지고, 내부의 환상은 비대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라기보다는 진정성에 대한 남겨진 과제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광규 시인의 시편 글귀가 내내 눈길을 붙잡는다. 부족한 나에 대한 일갈이다.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 김광규,「묘비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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