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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생시 - 윤의섭

2005.08.05 17:08

윤성택 조회 수:1573 추천:222

〈꿈속의 생시〉 / 윤의섭/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꿈속의 생시

        내가 이 해안에 있는 건
        파도에 잠을 깬 수 억 모래알 중 어느 한 알갱이가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듯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점점 선명해지는 수평선의 아련한 일몰
        언젠가 여기 와봤던가 그 후로도 내게 생이 있었던가

        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건
        흐드러진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녀지를 밟는다
        꿈에서 추방된 자들의 행렬이 산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문득
        한적한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다는 계속해서 태양을 삼킨다
        하루에도 밤은 두 번 올 수 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나는 생의 지층에 켜켜이 묻혔다 불려나온다


[감상]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발상도 발상이지만 <나>로 의식되는 근원을 찾으려는 흐름이 놀랍습니다. 기실 과학은 시간이라는 스펙트럼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시간개념의 인식론에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종교를 빌리지 않더라도 시간에 구속된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모래알>과 <유채꽃 꽃술>이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 시의 사유는, 죽음조차 소통의 부분이며 세계와의 교감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행이 말해주듯 이 생의 나는, 무언가에 호출되어온 기억이거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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