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김언/ 『게릴라』봄호 (2000년)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아침마다 썩는 냄새가 푹푹 쌓이는 마을, 이 마을 정중앙엔 커다란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를 쌓아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날이 밝으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도둑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꼬
리를 잔뜩 세운 고양이들은 밤새 참아왔던 허기를 게워내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썩는 냄새를 꾹꾹 채워 넣는다 오전과 오후 내내 도둑고양이들이 만찬을 즐기는
동안 집집마다 인간들은 밤새 내놓을 쓰레기들을 장만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윽고
쓰레기를 장만하지 못한 집들의 불안과 초조에 뒤섞여 저녁이 몰려온다 저녁이 밤
으로 바뀌기 전에 도둑고양이들은 전봇대 꼭대기로 올라가고 잔업에 밀린 인간들
은 피곤함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쓰레기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가까스로 목표량에 도달한 인간들은 오늘도 무
사히, 안도의 한숨의 내쉬며 집으로 돌아간다
[감상]
몰랐던 치열함입니다. 그의 시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분명 그 치열함에서 기인된 목소리일 듯 싶군요. 이 시는 상식을 뒤엎는 상상력이 큰 축입니다. "쓰레기를 장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들이 유일하게 멈추지 않는 행위라는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입니다. 사는 것이 이렇듯 버릴 수밖에 없는 목표량으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봇대의 도둑고양이에게 바쳐지는 쓰레기가 일과 중 꼭 거쳐야하는 제의(祭議)처럼 풀이 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