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둔 것이 많다」/ 정진규/ 《시작》 2004년 봄호
맡겨둔 것이 많다
세탁소에 맡겨 두고 찾지 못한 옷들이 꽤 여러 벌 된다 잊고 있다가 분실하
고 말았다 스스로 떠나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 몸을 입히고 열심히 낡아가고
있을까 내 길이 아닌 남의 길 어디쯤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나다니고 있을
까 그것들 말고도 내게는 맡겨둔 것이 많다 몇 해 전 일본 가고시마 공항 보
관소에 맡겨 두고 온 라면집 여자의 눈물도 있다 맡겨둔 것이 많다 지지난해
엔 내 아버지마저 하늘나라에 맡겨 드렸다 어머니는 훨씬 오래 전 30년이 넘
었다 나는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한 채 유보의 짐을 지고 기다리라고 기다리라
고 늑장을 부리고 있다 내 삶의 후반부가 더욱 더디다 꼬리가 길다 오늘도 기
다리다 지쳐 삼삼오오 스스로 길 떠나고 있는 뒷등들 아득히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런다
[감상]
세탁소로, 여행으로, 부모님으로, 그리고 다시 화자에게로 이 시는 ‘맡겨둔 것’에 대한 사유가 펼쳐집니다. 잔잔하게 넘나드는 소재의 운용은 말 그대로 노익장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있음직한 세탁소에 맡겨둔 옷, 비닐에 싸인 채 하얀 코팅 철사를 입고 어깨에 먼지를 훈장처럼 매단 옷은 또 얼마나 될까요. 한때 나의 전부였던 것을 맡겨둔다고 믿는 것… 보통 시 그 자체에서 감동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처럼 그것과 동시에 지난 일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도 있는가 봅니다. 언젠가 걸레가 되어버린 내 옷이 바닥의 눈물을 훔치는 꿈을 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