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 도종환 / 《작가세계》2004년 봄호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는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감상]
아내와의 관계를 가구를 통해 절묘하게 드러낸 시입니다. 이처럼 시란, 무언가에 감정을 빗댈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이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또 이 시가 보여주는 알레고리는 침묵에 익숙해진 중년부부의 관계를 보여준 것도 있지만, 性적 은유도 포함되어 있는 듯 싶습니다. 고개 숙인 가구의 그림자가 내내 잔상으로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