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문성해 / 200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등단
냄비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 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 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감상]
뭐랄까 생활에 배여 오는 진솔함일까요. 할인점에서 그것도 '고르고 고른' 새 냄비. 그것을 안고 귀가하는 여자의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집니다. 특히 2연 냄비에서 위안을 얻는 시인의 풍부한 감성은 진정성과 결합해 개성적인 환기를 보여줍니다.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는 필시, 이 시가 갖는 서정적 생명력일 것입니다. 사물의 핵심을 놓치지 않은 시인의 다른 발표시가 기다려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