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잠 속의 생애 - 배용제

2005.06.17 11:08

윤성택 조회 수:1426 추천:222

<잠 속의 생애> / 배용제/ 《시작》2005년 여름호


        잠 속의 생애

        잠 속에서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린다
        누구와 채널을 맞춘 것일까
        때로 웃기도 하다 손발을 흔들기도 한다
        낯선 발음들에 귀 기울인다
        밥 먹었느냐구,
        친구 만나고 오느냐구,
        그녀는 잠 속에서도 한 생을 살고 있다
        그곳이 어딘지, 덩그렇게 혼자 남은 방을 휘둘러본다
        잠 속의 그녀는
        먼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그보다 더 멀리
        은하계 어느 별, 에메랄드 성벽으로 둘러 쌓인 실내에서
        그곳의 남편과 새하얀 자식들이랑 마주 앉아서
        다과를 나누는 걸까
        산책길에 햇살보다 더 황홀한 빛에 도취된 걸까
        가끔은 홀로 남겨진 내가 못미더운 듯
        실눈을 떴다 다시 감으며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기괴한 생을 살다 온다
        그럴 때면 거친 소리들이 잠 속으로 흘러 다닌다
        여기의 잠이 그곳의 일상이 되고
        그곳의 잠이 이곳의 일상이 되는 그녀의 이중생활
        우리는 그렇게 먼 거리를 달려와 낯선 별의 한때를
        순식간에 흘려보낸다
        몸을 뒤척이다 겨우 나를 바라본다
        몇 십 년을 살다 온 얼굴로.


[감상]
누구에게나 그렇듯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작금의 도덕과 종교, 과학 위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세워야 합니다. 이 세계관이 시로 쓰이게 될 어떤 현상에 <직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 점이 바로 글짓기와 詩쓰기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모든 관념과 고민, 통찰을 활자로 점철해내는 것입니다. 이 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렇듯 현실성을 넘지 않는 상상력과 <시간>에 대한 깊이 있는 모색 때문입니다. 잠 속의 삶과 잠 밖의 삶을 오가는 <그녀>의 연민의 표정도 내내 인상에 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매일 밤 급속안구운동(REM) 수면 시간에 2시간 이상 꿈을 꾼다고 합니다. 잠 속의 또 다른 生을 살러가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하루가 노곤해지는군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71 냉장고 소년 - 진수미 2005.09.15 1709 224
970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 김언 2002.06.14 1225 224
969 정동진 - 이창호 2001.09.26 1511 224
968 캣츠아이 13 - 노혜경 2001.09.18 1298 224
967 아득한 봄 - 천수호 2006.07.01 1876 223
966 냄비 - 문성해 2004.10.21 1429 223
965 내 가슴의 무늬 - 박후기 2004.07.16 2160 223
964 가구 - 도종환 2004.03.31 1313 223
963 맡겨둔 것이 많다 - 정진규 2004.03.03 1648 223
962 홍예 - 위선환 2004.01.12 1102 223
961 무덤생각 - 김용삼 2003.01.23 1000 223
960 그런 것이 아니다 - 김지혜 [2] 2001.08.30 1535 223
959 객관적인 달 - 박일만 [3] 2005.10.25 1639 222
958 십자로 - 이동호 2005.10.11 1547 222
957 감나무가 있는 집 - 김창균 [2] 2005.09.28 1775 222
956 꿈속의 생시 - 윤의섭 2005.08.05 1573 222
955 꽃 꿈 - 이덕규 [1] 2005.07.27 1996 222
» 잠 속의 생애 - 배용제 [1] 2005.06.17 1426 222
953 산책 - 이기성 2003.01.17 1414 222
952 중간쯤 - 김왕노 2006.12.01 1416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