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도너츠의 하루 - 조인호

2006.11.27 11:37

윤성택 조회 수:1329 추천:209

<도너츠의 하루>/ 조인호/ 《문학동네》2006년 신인상 당선작 中


        도너츠의 하루

        잘 튀겨낸 도너츠일수록 구멍은 둥글다
        팔팔 끓는 기름마냥 꿈자리가 사나운 밤 속에
        몸을 담갔다가 일어난 아침 둥근 창문을 열면
        바람은 밀가루 반죽처럼 배배 꼬이면서 불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지문이 내 몸에 하얀 밀가루 자국을 남기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다
        옷을 입으면 툭툭 떨어지던 단추들은 모두 어디로 굴러갔을까
        우유배달원 대신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옆집 아줌마의
        둥근 훌라후프 사이로 빠져나온 뱃살 소리
        나는 그 출렁출렁한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늘 내 목에 얹힌 둥근 올가미 같은
        하루를 꾸역꾸역 삼켜야 한다
        목마른 듯 덜 깬 잠은 커피처럼 하루 내내
        몽롱한 향기를 풍긴다 혹은 도너츠에 솔솔 뿌린
        설탕가루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지하철 입구로 들어서면
        우르르 달려드는 개미떼, 구멍난 내 몸을 짊어지고
        순식간에 열차 한 귀퉁이로 몰아내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박스 포장된 일터 안에서도 내 몸에 난 구멍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화장실 가듯이
        동료들은 내 몸을 통과하여 변기 구멍에 볼일을 본 후
        물을 내린다
        꾸르륵, 다시금 나의 구멍난 하루가
        내리막길 바퀴처럼 어딘가로 끝없이 달려가는 소리
        온종일 귓구멍에서 울려대는
        오늘은 이상도 하지,
        바로 시원하게 구멍난 도너츠의 하루이기 때문이다


[감상]
<도너츠>의 둥근 모양에서 파생되는 이미지를 하나의 궤로 연결시키는 솜씨가 있는 시입니다. 시적 대상으로부터 사유가 한정되지 않은 점도 돋보입니다. 이는 도너츠에 대한 관찰, 즉 도너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뼈대로 하고, 말랑말랑하고 발랄한 감수성을 살로 붙였다고 할까요. <단추>, <훌라후프>, <올가미> 등 <둥글다>로 환유되는 흐름을 짚어가며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습니다. 낯익은 일상들이 낯설게 보이는 말 그대로 <도너츠의 하루>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51 꽃피는 만덕 고물상 - 권현형 [2] 2005.10.06 1458 221
950 교통사고 - 김기택 [4] 2005.06.14 1640 221
949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1] 2005.05.06 1778 221
948 비렁뱅이 하느님 - 정우영 2004.03.16 1147 221
947 블랙박스 - 박해람 2003.12.08 1176 221
94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9 221
945 너 아직 거기 있어? - 김충규 2002.06.15 1336 221
944 내 후생을 기억함 - 이성렬 2006.03.07 1730 220
943 섀도라이팅 - 여태천 2006.02.14 1307 220
942 겨울 저녁의 시 - 박주택 2005.11.12 1982 220
941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 문세정 2005.10.18 1505 220
940 풍림모텔 - 류외향 [1] 2005.08.08 1408 220
939 포레스트검프 - 문석암 [3] 2005.01.27 1331 220
938 그것이 사실일까 - 류수안 2004.10.13 1298 220
937 달의 눈물 - 함민복 [1] 2004.08.24 2187 220
936 후박나무가 있는 저녁 - 이영식 2003.07.29 1130 220
935 낡은 침대 - 박해람 [2] 2006.07.22 1918 219
934 내리막길의 푸른 습기 - 이승원 2006.05.12 1562 219
933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932 천막 - 김수우 2005.09.24 1404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