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났다> / 김연성/ 《미네르바》 2006년 여름호
발령났다
그는 종이인생이었다 어느 날
흰 종이 한 장 바람에 휩쓸려가듯이 그 또한
종이 한 장 받아들면 자주 낯선 곳으로 가야했다
적응이란 얼마나 무서운 비명인가
타협이란 또 얼마나 힘든 악수이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읽지 못할 것이다
얇은 종잇장으로는 어떤 용기도 가늠할 수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읽는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그 골목의 정체없는 어둠이다
그는 늘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이런 각오했다
"타협이 원칙이다
그러나 원칙을 타협하면 안 된다"
나일 먹을수록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모없다고
누군가 자꾸 저 세상으로 발령낼 것 같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원칙까지도 타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허리까지 휘어진 어둠 속에서
꺼억꺼억 토할지 모른다
모든 과거는 발령났다 갑자기,
먼 미래까지 발령날지 모른다
시간은 자정 지난 새벽1시,
골목 끝에 잠복해있던
검은 바람이 천천히 낯선 그림자를 덮친다
[감상]
직장인의 비애 같은 거랄까요. 이 시를 읽으니 우리네 삶이 종이 한 장의 행방에 달려 있다는 서글픔으로 전해집니다. 이력서나 경력증명서 이런 서류 따위가 사람보다 먼저 평가되고 또 그렇게 종종 운명을 바꿔 놓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구로 이뤄진 <타협>과 <원칙>의 직관은 우직한 선서 같습니다. 더불어 사회생활에서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서 더 나아가 <저 세상>과 <미래>로 확장되는 의미도 이 시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군요. 회사에 <발령>이 이뤄지게 되면 부산하게 술자리가 이어지겠지요. 누구는 승진하고 누구는 낙담하고… 새벽골목에서 토악질해 놓은 건, 채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의 덩어리는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