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의무기록실의 K양 - 문성해

2006.07.19 10:31

윤성택 조회 수:1367 추천:202

<의무기록실의 K양> / 문성해/ 《문장웹진》2006년 7월호


        의무기록실의 K양

        K양은 대학 병원 지하 3층 의무기록실에서 일을 한다
        하루 종일 도서관처럼 빼곡한 책장 사이로 차트를 찾으며 돌아다닌다
        걸려오는 전화도 매양 누구누구의 차트를 찾아달라는 내용들뿐,
        K양은 맞선 볼 때도 그 남자가 갖고 있는 차트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한 아기가 태어날 때 이곳에서는 이름보다도 먼저 차트가 준비된다
        사람은 죽어도 차트는 남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
        가족보다 환자의 뜨거운 피와 살보다
        더 자세히 아픔의 경로를 잘 알고 있는 저 차트들
        그녀는 출근 며칠 만에 알았다
        사람의 나이완 상관없이 굵어지는 차트도 있다는 것을,
        간혹 성경처럼 두꺼운 그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어떤 거룩한 말씀보다 더 절규 가득 찬 말들을 읽어내곤 전율한다
        온갖 병명들 사이에서 운 좋게도 아직 자신의 차트를 갖지 못한 그녀
        혹시 모른다
        어디선가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게 그것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불을 끄면 캄캄한 동굴로 바뀌는 이곳으로 그녀는 아침마다 출근을 한다
        밤사이에 또 어떤 병명들이 태어났을까
        두근거리는 얼굴로 기다리는 저 편철(編綴)된 병력들
        그녀는 수없이 빽빽한 병명들 사이에서 늙어 가는 자신을 상상하며 몸서리친다

        햇빛 한 줄기 없이 꽃이 피는 것도 병이다
        형광등 아래 흔하디흔한 병명 하나 없이 호접란 하나 슬며시 피어 있다


[감상]
<차트>에서 촉발되는 발견이 활달한 시적 동력입니다. <병명>을 기록하는 <차트>의 쓰임과 가치는 시인의 사유를 거쳐 새로운 의미로 긴장됩니다. 온전히 <차트> 하나로 또 다른 삶의 이면을 모색한다고 할까요. 지하3층 의무기록실을 직시하는 시인은 관찰에서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의 체험적 철학과 연동해 <아픔의 경로>와 <절규 가득 찬 말들>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일생 도사리고 있는 병명의 차트에 <전율>과 <몸서리>로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차트는 어떻습니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31 사랑 - 고영 [5] 2005.03.08 2366 219
930 잔디의 검법 - 강수 [1] 2005.01.26 1114 219
929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최갑수 2004.02.14 1665 219
928 섬 - 최금진 2002.09.30 1554 219
927 숨쉬는 일에 대한 단상 - 이가희 2002.09.25 1218 219
926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925 틀니가 자라는 폐가 - 이혜진 2002.09.02 1121 219
924 카니발의 아침 - 박진성 2002.06.07 1165 219
923 빙어 - 주병율 2006.03.21 1612 218
922 토기 굽는 사람 - 최승철 2005.11.28 1528 218
921 가을이 주머니에서 - 박유라 [1] 2005.11.25 1763 218
920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2] 2005.09.26 2035 218
919 빗소리 - 김영미 2005.05.11 2006 218
918 즐거운 소음 - 고영민 2003.01.18 1207 218
917 용설란 - 최을원 2002.10.08 1120 218
916 나에게 사랑이란 - 정일근 2001.08.27 1715 218
915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2006.12.14 1429 217
914 지는 저녁 - 이은림 [1] 2006.09.19 2140 217
913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912 민들레 - 김상미 [4] 2005.04.26 2314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