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 / 한용국/ 《현대시》 2006년 8월호
밤비
나뭇잎에서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다
그 순간 내 이마를 휘돌아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헤엄쳐 가는
물고기의 은빛 꼬리를 본 것도 같았다
나는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다
물방울들이 벼랑에 얼음조각처럼 맺혀 있었다
쌀알에 불경을 새긴다는 승려도 알고 있다
반야심경을 쌀 한 톨에다 새겨 넣는다고 했다
맨 눈으로는 못 보고 마음의 돋보기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막 이마를 때리고 지나간 물방울 속으로
밤의 벼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으로
팔만 사천 경전을 새겨놓은 승려의 한 톨 심장 속으로
물고기는 은빛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갔을 것이다
나뭇잎들이 저마다 빗소리에 솨아솨아 귀를 열기 시작하고
내 눈 속에 먹을 잔뜩 머금은 한지 한 폭이 젖어 내리고 있었다
[감상]
이마에 떨어진 물방울을 포착하는 시선이 싱그럽습니다. 툭 터지는 물방울의 차가움이 <물고기의 은빛 꼬리>가 되는 상상, 이렇듯 이 시의 매력은 작은 물방울의 존재를 인식의 전환으로 확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쌀알에 불경을 새긴다는> 의미 또한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우리의 뻣뻣한 상식을 어루만지며 마음과 귀를 열게 합니다. 사실 이 시의 압권은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란 대상에 스미는 한지 같은 거란 걸 느끼기에, 밤비에 마음이 저리 젖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