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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묘석 - 김병호

2006.01.23 11:20

윤성택 조회 수:1592 추천:255

<강가의 묘석> / 김병호/  《애지》 2005년 겨울호


        강가의 묘석(墓石)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다

        밤마다 강 건너에서 손사래를 치던 그 몸짓이
        날 물리치던 것이었는지, 부르던 것이었는지

        어둔 꿈길을 막니처럼 아리하게 거스르면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은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개짓을 한다

        불온한 전생(全生)이 별자리를 밟고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지극(至極)이
        강물에 닿기 전,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문신처럼 옮아오는 앙상한 길
        내 몸을 빌려 검게 꽃 피는 아버지
        모두가 한 물결로 펄럭인다

        변방의 밤하늘은 마른 저수지마냥
        외롭고 가벼웠다
        어둠 저편에서 절벽처럼 빛나는 녹슨 닻
        
        생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는데

        나는, 새벽이 오는 변방의 강가에 기대어
        아버지와 아이의 멸망을 지켜볼 뿐
        차마 묘석(墓石)처럼 깜깜하지 못했다


[감상]
강가에 아버지의 무덤이 있고 묘비가 있습니다. 이 시는 아이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상상하고 더 나아가 꿈 속 그 강가의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한 행 한 행 단단한 서정으로 진행되는 밀도와, 거기에다가 기억에서 꿈의 구조로 몰입되는 흐름이 돋보이는군요. 과거이면서 동시에 미래인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그 억제된 기억이 복원되는 순간 <겨울 천정에 얼어붙었던 철새들/ 그제야 깊고 낡은 날개짓을 한다>는 상상력이 참 인상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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