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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의 푸른 습기 - 이승원

2006.05.12 13:45

윤성택 조회 수:1562 추천:219

《어둠과 설탕》 / 이승원/ 문학과지성사  


        내리막길의 푸른 습기

        밤이 산책을 제안했다
        소용돌이 같은 검은 웅덩이에 바늘이 내려졌다
        나는 부름에 응답했다
        가지마다 전구를 감아 빛나는 호텔 정원수들과
        치과 의원 건물을 뒤로하고
        즐비한 저택들 사이를 내려갔다
        처음 오는 택시 기사들이 놀라거나 분노하는 길을
        그들은 대개 이곳에 누가 사는가를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외교관저 의경들은 아그리파 두상의 표정을 가졌다
        밖으로 나오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샴푸 냄새가 다가왔다
        가끔 자동차가 망설이며 질주했다
        갈림길에는 눅눅하고 서늘한 빈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십 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저택의 노란 불빛에 빈집의 푸른 암흑에
        다리는 침대를 찾아 흔들렸다
        경비 초소는 모퉁이마다 있었지만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정표처럼 환한 소음과 반짝이는 간판들이 나타났다
        소방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리는 언제나 밤을 거세하며 흘러갔다
        나는 잠 속에서 다른 길이 될 수 없었고
        꿈꾸는 동안 나이를 먹었다


[감상]
시는 경험된 현실을 시인만의 인식의 필터로 걸러낸 일종의 잔유물입니다. 그리하여 기억은 사라지거나 침전되는 과정에 있으며, 그것들을 명명하는 편린들은 거미줄처럼 의미망을 드리운 채 가늠할 수 없는 의식의 빈 공간에 걸쳐져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자의든 타의든 어떤 계기로 인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게 되면, 시인은 그 날것의 인상을 일관성 있는 직관으로 뭉쳐냅니다. 밤의 산책에서 보는 풍경이 이처럼 낯선 이유도 의식 속에 혼재된 파편들이 하나로 묶이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물들의 역할이나 성격이 물감처럼 섞인 이 시에는 거친 질감의 추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그리파 두상의 표정>을 곁들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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