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 꽃이 꽃 속으로 들어가> / 이덕규/ 《시선》2005년 여름호
간질, 꽃이 꽃 속으로 들어가
아침에 피었던 꽃이 일몰과 함께 황급히 꽃잎을 접으며
캄캄하게 문을 걸어 닫는다 꽃이,
꽃 자신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잠수하듯이
숨을 참고 다년생 구근 속으로 내려가는 저녁
눈알을 백팔십도 굴려 자신의 내면을 골똘히 추적하는지
하얗게 셔터를 내리고 임시휴업 중인
켄터키 후라이드치킨 집 앞,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화분 옆에 한 사내가 쓰러져 심하게 떨고 있다
수시로 일어나는 모반의 내부 참극, 자신에게
완전히 유린 당했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의 비틀린
사지를 주무르는 동안 소용돌이치는 몸속의
거센 물살 속에서 익명의 또 다른 나와 사투를 벌이는지
아니면 이미 뻣뻣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사체를 더듬으며 울부짖는지
허공에 뻗친 그의 손이 자꾸 움찔거린다
서서히 고요해지는 심연 속에서 오리무중
거품이 입가로 방울방울 올라오고 마침내 낯선 사내가
생사의 수면 위로 떠오르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뿜는다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어두운 화분 위로 솟은 가는 꽃 대궁 속에서 누군가
감쪽같이 제 손으로 제 목을 조이며 파르르 떨고 있다
[감상]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는 탁월한 직관의 시입니다. 꽃은 꽃대로 간질 발작중인 사내는 사내대로, 중첩시키거나 잇대거나 씨줄과 날줄을 덧대듯 치밀한 교직이 좋습니다. 간질이 병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분열되어 있는 수많은 자아의 혼돈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흥미롭습니다. 그리하여 이 봄날 <꽃핌>은 발작을 일으키는 뿌리의 떨림이었다는 사실. 참신한 발상과 소재 운용, 거기에 관찰력까지 두루두루 빼어난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