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불우를 씻다 - 유정이

2011.01.27 11:39

윤성택 조회 수:896 추천:112


《선인장 꽃기린》/  유정이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황금알》시인선 35

          불우를 씻다

        술취해 돌아온 그의 하루를 부축해
        안으로 들인다 어느 지점에서 일어난
        추돌사고였을까 생각을 들이받히고
        얼마나 심하게 우그러졌던 것인지
        일그러진 얼굴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외로 꼬인 고개 바로 누이고
        옷을 벗겨준다 못다 한
        주행이 있다는 듯 그는 선뜻
        앙다문 고집을 벗지 않는다 미처 속도를
        떼지 못한 발끝에 가지 않은 길 도르르 말려있다, 입안 가득
        뱉지 못한 말들 재갈처럼 물려 있다

        벗은 그의 몸을 씻겨준다
        너무 많이 먹었거나
        잘못 삼켰던 말의 흔적들 선연하다
        뒷주머니에 찔러주었던 마음
        어디에 떨어뜨리고 왔는지
        바닥까지 내려서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번도 그는 내게
        무방비하게 자신을 맡긴 적 없었다
        생애 처음 내게 투신한
        벗겨진 남자의 몸을 받아 안는다
        어디쯤 두고온 정신을 데리러 갔는지
        그러다 곧 깜박 두고온 자신을 만났는지
        씻겨진 그가 눈도 뜨지 않고 빙긋, 웃는다

        닦인 것은 그의 오물인데
        말갛게 씻긴 것은 그가 아니다
        

[감상]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중요한 사안이 술자리에서 결정되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시대의 고단한 가장들은 늦은 밤까지 술자리를 견뎌야 합니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절제하다가도 모임이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긴장이 풀려 취기가 더욱 괴롭게 할 것입니다. 때론 격론이 오갔을지도 모를 그 자리를 ‘추돌사고’로 이어가면서 ‘그’를 보듬고 씻기는 애정이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생애 처음 내게 투신한/ 벗겨진 남자의 몸을 받아 안는’ 그 상황이 눈에 선한 건, 나도 당신도 한때 받아주거나 기대야 했던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연의 두 줄은, 이 시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수사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71 첫 키스 - 함기석 [3] 2008.04.08 2527 192
1170 낙엽 - 이성목 [2] 2005.11.10 2520 228
1169 눈을 감으면 - 김점용 [1] 2011.01.22 2491 113
1168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2010.02.18 2487 192
1167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166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9 273
1165 사랑 - 김요일 2011.04.04 2461 158
1164 2006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6.01.02 2454 270
1163 꽃들에게 묻는다 - 채풍묵 [1] 2008.04.01 2436 187
1162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1161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2006.07.04 2417 236
1160 가로등 - 한혜영 [1] 2006.03.27 2384 277
1159 사랑 - 고영 [5] 2005.03.08 2366 219
1158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
1157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 차주일 [1] 2005.09.29 2314 254
1156 민들레 - 김상미 [4] 2005.04.26 2314 217
1155 2005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8] 2005.01.03 2300 229
1154 사랑이 나가다 - 이문재 2006.06.30 2289 215
1153 빈집 - 박진성 2001.12.05 2285 196
1152 연애 - 안도현 2001.04.20 2280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