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을에는 - 최영미

2001.08.31 11:56

윤성택 조회 수:2431 추천:235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 창작과비평사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감상]
하늘을 보니, 정말 가을이네요. 그래서 흔히 계절성 우울증이라는 "가을 탄다"는 말이 있는 걸까요? 이 시가 좋은 부분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이 부분은 "가을"이기에 가능한 정황이 아닐런지요. 언젠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그 중 센치한 후배에게 괜히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곁에 앉았습니다. "최영미 식으로 반응 좀 해봐"라고 농담을 했더니, 눈만 둥그레 하더군요. 시에 여성성을 담보로 한 재밌는 허락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71 감나무 전입신고서 - 이선이 2002.11.06 914 185
1170 천막교실 - 김경후 2003.05.13 914 163
1169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2009.11.04 917 116
1168 수은 온도계 - 윤이나 2002.12.26 922 170
1167 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 - 이덕규 2003.05.12 922 169
1166 무가지 - 문정영 2011.01.18 924 103
1165 빈 손의 기억 - 강인한 2009.11.14 926 115
1164 로맨티스트 - 하재연 2009.11.17 927 108
1163 흩어진다 - 조현석 2009.11.10 928 139
1162 어느 행성에 관한 기록 - 이정화 2009.12.16 929 125
1161 다리 마네킹 - 박설희 2003.08.22 932 164
1160 죽음의 강습소 - 박서영 2003.01.09 937 199
1159 사랑의 물리학 - 박후기 [1] 2009.11.05 937 105
1158 경비원 박씨는 바다를 순찰중 - 강순 2003.04.30 938 160
1157 연리지 - 박소원 [1] 2011.01.07 939 112
1156 상상동물 이야기·5 - 권혁웅 2003.03.28 941 154
1155 빙점 - 하린 2011.01.15 941 81
1154 숲 - 이기선 2009.11.09 945 112
1153 엘리스와 콩나무 - 김참 2002.12.17 946 169
1152 수궁에서 놀다 - 박진성 2003.02.11 947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