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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와 콩나무 - 김참

2002.12.17 15:09

윤성택 조회 수:946 추천:169

엘리스와 콩나무 / 김참 / 『시인세계』2002 겨울호



        엘리스와 콩나무


  이상한 나라의 거대한 콩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콩나무 가
지에는  벌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가 옥탑방에  누워 소설을
읽고 있을 때  스페이드 무늬 군복 차림의 트럼프 병정들이 붉은 드레
스를 입은 여왕 앞으로 엘리스를 끌고 왔다 저년의 목을 쳐라! 여왕이
고함을 질렀지만 병정들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저년의 목을 쳐라!
화가 난 여왕이 더 크게 고함을 지르자  잠자던 벌들이 벌집에서 쏟아
져 나왔다  깜짝 놀란 여왕과 병사들은 궁전을 향해  부리나케 달아났
다  콩나무 뒤에 숨어 낮잠을 자던  흰토끼가 손목시계를 보며 바쁘게
뛰어간 뒤에  콩나무 옆 우물에서  포도주가 쏟아져 나왔다  포도주를
잔뜩 마신 엘리스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엘리스의 머리통이 부풀어
올랐고 엘리스의 팔다리가 쭉쭉 늘어났다 엘리스의 커다란 손이 옥탑
방 창문을 열고 들어와 내가 읽고 있던 소설책을, 음악이 흐르던 라디
오를, 바둑판 위의 텔레비전을 집어 던졌다  옥탑방 거울 속에는 엘리
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빛났고,  엘리스의 커다란 입술이  씰룩거렸다
엘리스의 커다란  손가락이 방구석의 옷걸이를,  옷걸이 옆의 전축을,
전축 옆의  책꽂이를 마구 망가뜨리고 있었다  내가 방에서  뛰어나와
콩나무 줄기를 타고  정신없이 달아날 때  트럼프 병사들은 뚱뚱한 엘
리스를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엘리스의 하얀 팔에,  엘리스의
하얀 목덜미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화가 난 엘리스는  병정들을 집
어던지며 여왕을 잡으러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스의 다리가 땅을 밟을
때마다 콩나무가 몹시 흔들렸다  벌통이 떨어졌고 콩깍지가 벌어졌고
콩깍지 속의 검은콩들이 콩나무 아래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감상]
이 시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동화의 스토리를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이 상상력의 골간에 화자인 '나'를 투입시킴으로서 현실과 동화의 간격을 허물어버립니다. 기실 이 시에 등장하는 '뚱뚱한 엘리스'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일 겁니다. 동시에 예측불허의 상황과 에피소드로 정서적인 충격 즉, 낯설게 하기의 효과 또한 불러왔을 것이고요. 동화와 현실의 결합, 또 거기에서 오는 임의성. 이 시 만의 독특한 장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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