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로등 - 한혜영

2006.03.27 10:46

윤성택 조회 수:2384 추천:277

<가로등> / 한혜영/ 문학동인 《빈터》 5집 (2006) 中


        가로등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감상]
가로등은 춤바람 났던 아저씨의 고개 숙인 참회와 같은 거군요. 빳빳한 <칼주름>이나, 구겨진 <청춘>과 불콰한 <염치없음>의 표현들이 가로등이라는 대상과 어우러져 한 남자의 생을 잔잔하게 조명합니다. 그리하여 저 밖에서 서서 비 맞는 가로등의 왠지 모를 쓸쓸함은, 청춘을 탕진하고 고개 숙인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 것만 같아 명치끝이 아릿해져옵니다. 우리는 일생의 무엇을 좇아 마음의 안식처였던 <동네>를 내려가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회한이 응축된 눈물 같은 비가 흘러내리는 밤, 가로등은 남은 시간 내내 저리 서 있을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71 첫 키스 - 함기석 [3] 2008.04.08 2527 192
1170 낙엽 - 이성목 [2] 2005.11.10 2520 228
1169 눈을 감으면 - 김점용 [1] 2011.01.22 2491 113
1168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2010.02.18 2484 192
1167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0 271
1166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6 273
1165 사랑 - 김요일 2011.04.04 2460 158
1164 2006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6.01.02 2454 270
1163 꽃들에게 묻는다 - 채풍묵 [1] 2008.04.01 2436 187
1162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1161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2006.07.04 2417 236
» 가로등 - 한혜영 [1] 2006.03.27 2384 277
1159 사랑 - 고영 [5] 2005.03.08 2366 219
1158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3 313
1157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 차주일 [1] 2005.09.29 2314 254
1156 민들레 - 김상미 [4] 2005.04.26 2314 217
1155 2005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8] 2005.01.03 2299 229
1154 빈집 - 박진성 2001.12.05 2285 196
1153 사랑이 나가다 - 이문재 2006.06.30 2283 215
1152 연애 - 안도현 2001.04.20 2279 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