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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2009.11.04 13:27

윤성택 조회 수:917 추천:116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 허수경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 문학사상. 2009년 11월호 中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의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감상]
‘것이다’의 반복이 매혹적입니다. '것이다'를 반복하게 되면 시를 읽고 있는 독자와 시 속의 화자와 거리감이 드러나게 되어 거기에서 성찰적 기운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것이다'의 주어가 사물일 경우 독자의 목소리를 환기케 하여 정서적 동질감을 주기도 합니다. 참고로 모름지기 시에 있어 ‘~것이다’의 문체적 효과가 빼어난 시인은 ‘백석’시인이지요. 도심공원의 어느 오후의 풍경이 잔잔하게 펼쳐지면서 시인의 오감이 그대로 행간으로 전해집니다. 운명을 탕진한 사내의 모습에서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당신’을 떠올립니다. 외로운 사람. 저녁놀이 서녘으로 사라져가듯 여운을 이어 놓은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도 새롭습니다. ‘뜨거운 발’은 그야말로 저녁놀의 붉은 기운이겠지만, 늙은 남자의 한때의 청춘일 수도 있고 우리의 추억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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