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나무의 내력(來歷) - 박남희

2001.04.04 16:01

윤성택 조회 수:2042 추천:291

* 현대시 [폐차장 근처] 시집 中




나무의 내력(來歷)

박남희



신神은 흙을 창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창조하였다 나무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흙이 전해주는 육체의 소리를 들었다 흙은 나무에게 나무가 알지 못하는 나무의 내력을 이야기해주었다


본래 나무는 종鐘이었다
밖으로 나오려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무수한 고통의 이파리들을 푸드덕거리던 종이었다


그러다가 종은 제 안의 울음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책이 되었다 그 때부터 나무는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몸 안에 가두고
시간의 물관부 사이에
나란히 배열시키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책 속의 역사는 수시로 요동했다
그리하여 나무는
모든 흔들리는 것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을
이 땅의 중심에 붙잡아 놓기 위해
흙 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무의 뿌리는 본질적으로 불온했다
뿌리는 흙 밖으로 제 몸을 뻗어
흙이 들려주었던 제 안의 이야기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메아리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무는 종이다 키크는 울음이다 시냇물을 거느린 역사책이다 뿌리가 아픈 바람이다 더구나 불온한 시인인 나무는 허공을 향하여 끝없이 손을 흔드는 제어불능의 상상력이다 밤마다 그녀를 생각하며 보름달을 품에 안고 뒹굴던 그 나무는……


[감상]
나무에게 다른 이름, 다른 의미, 다른 역할을 주게 한 시입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나무가 하나의 책이며, 아버지가 됩니다. 직관 하나만으로도 이처럼 설득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랄 따름입니다. 당신의 나무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세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71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7 324
1170 맑은 날 - 김선우 2001.04.18 2226 284
1169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2001.04.19 2094 292
1168 연애 - 안도현 2001.04.20 2280 282
1167 여자들 - 김유선 2001.04.21 1864 291
1166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65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64 벽돌이 올라가다 - 장정일 2001.04.25 1711 294
1163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62 자미원민들레 - 이향지 2001.04.27 1575 291
1161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60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3 319
1159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1] 2001.05.02 1818 278
1158 백제탑 가는 길 - 신현림 2001.05.03 1328 252
1157 두통 - 채호기 2001.05.04 1393 242
1156 바구니 - 송찬호 2001.05.07 1406 270
1155 마포 산동네 - 이재무 2001.05.08 1694 250
1154 목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유용주 2001.05.09 1260 255
1153 저수지 - 김충규 [1] 2001.05.10 1371 266
1152 버려진 식탁 - 이윤학 2001.05.11 1363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