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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 박씨는 바다를 순찰중 - 강순

2003.04.30 11:03

윤성택 조회 수:938 추천:160

「경비원 박씨는 바다를 순찰중」 / 강순 / 『현대문학』2001년 12월호



             경비원 박씨는 바다를 순찰중


  지금 102동 경비원 박씨는 바다를 지키고 있다. 첫 서랍을 열면 우체부가 맡기고 간 꽃돔, 나비돔 등이
나온다.  두 번째 칸에는 하얗고 까만 물방울무늬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한적하고 권태로운 바다.  주민
인적 사항은 바다 물고기들의 이름처럼 다양하다.  그 안을 들추면 한 집에  한두 대씩은 거의 갖고 있는
자가용 번호,  장부 위로 주머니 속에서  버스표를 물고 나타나는 못생긴 쏨뱅이,  피우던 담배 꽁지에서
사뿐히 재떨이로 퍼지는 우뭇가사리 가지들.  인터폰이 울릴 때마다  놀래며 도망치는  소라, 멍게, 해삼
들. 박씨가 마른침을 내뱉자 물결이 크게 출렁거린다. 조그마한 물방울 입자들과 함께 재떨이 위로 뽀글
거리며 오르는 다시마 줄기들. 얼음판 길에  미끄러진 마누라는 입원 중.  허리뼈에 금이 갔다나? 박씨가
질겅질겅 씹던 껌을 뱉는 순간  휴지통에서 길다란 미역이 고개를 치켜들며 나풀거린다.  병원비로 내야
할 돈을 붙여 놓으면 이 만큼은 하겠구만, 가끔 바닷물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길이 마주치면 그는
의무감으로 무장한 스킨스쿠버처럼 활짝 웃는다. 입 주변의 근육이 귀 옆으로 당겨진 순간  마누라 엉덩
이살 같이 보들보들한 날치 지느러미가 입술을 살살 간지럽힌다.  그렇게 한적하고 나른한  햇살의 바다
를 순찰하던 박씨, 순간 일어선다. 단속해야 할 잡상인 트럭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바다 밖으로 지나간다.
경비실을 나서는 순간, 그는 자신의 바다를 가족을 먹여 살리는 커다란 수족관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감상]
읽는 내내 신선하고 놀랍습니다. 경비실을 '바다'화 시키는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내와 가족을 부각시키는 서사도 주제에 힘을 실어줍니다. 경비실을 경비실로 보지 않는 눈, 상식을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발견으로 틀을 지탱하는 힘. 이것이 좋은 시가 되기 위한 발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모니터를 품고 있는 세상은 또 무엇으로 달리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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