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 / 『안개와 불』/ 민음사
첫사랑
모두머리 한 누이와 아버지를 기다리며
해인초를 씹었다. 바다 가까운 마을에선
흰 꽃 눈이 지고
철들무렵 내 호주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샌 밤을
셀 수 없이 많이 갖고 있었다.
별은 내가 꼽을 수 있는 손가락보다 많았다.
토주 냄새 부벼오는 꺼칠한 턱을 피해
아침 저녁 주름질 날 없는 바다의 머리맡에
잔잔히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한 번도 얼굴 보지 못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잊어버렸다 생각날 쯤에 바람은 불고
아버지 키만한 둑위에서
누이는 수수러지는 치마를 한 손으로 덮어버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내륙의 더운 가슴을 지나 강물이
처음 바다를 만나는 것을
[감상]
첫사랑. 이 말을 발설하게 되면, 누구든 아릿해집니다. 이렇듯 첫사랑은 왼쪽 어깨에 어릴 때 맞았던 불주사 자국처럼 남아 있습니다. 요즘 TV에 종종 보이는 하재봉의 초기시입니다. 그리 길지 않지만 이 시 속에는 화자의 가족사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사춘기 시절, 여러 상상을 통해 사랑을 마음 속에 주물鑄物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누이. 자꾸만 "누이는 수수러지는 치마를 한 손으로 덮어버렸다"가 시선에 밟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