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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버스 - 김소연

2010.01.19 20:44

윤성택 조회 수:951 추천:113

  《눈물이라는 뼈》/ 김소연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69

        로컬 버스
        - 비카네르에서 자이살메르까지*

        버스를 한번 내릴 때마다
        환생을 나는 하고 있다

        몸 안 깊은 동굴에 머물던 짐승들이
        한 마리씩 앞 정류장에서 먼저들 내리고
        나는 한 정류장을 꼭 더 가게 된다

        먼저 내린 짐승 하나가
        꾸덕꾸덕 고개를 구부리며 길 없는 언덕으로 사라질 때마다
        태양은 칠흑을 천천히 지워버린다
        알현을 끝낸 신하처럼 어둠은
        뒤로 걸어 허리를 숙인 채 공손히 사라진다
        세워둔 배낭처럼 나는 허술하게
        잠도 없고 세수도 없이 먼지 옷만 차려입고
        버스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막 한가운데의 바오밥나무거나
        머리에 물 양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불가촉천민이거나
        땅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코브라이거나
        잠시 빛 뒤로 숨는 별 하나다

        운전사가 버스를 세워놓고 갓길에서 노닥거릴 때
        귀가 간지러워 새끼손가락을 귓구멍에 넣느라
        이번 생도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비카네르Bikaner, 자이살메르Jaisalmer; 인도 라자스탄 주 타르사막에 있는 도시 이름들.
  
[감상]
우주의 시작과 끝이 하나의 궤에 있다면 인간의 생명 또한 그러한 하나의 질서에 편재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이러한 여정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우주의 저물녘까지 운명을 같이하는 거겠지요. 불교적 사유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행이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한동안 함께하다 내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난날 수많은 과오는 나의 일부인 어리숙한 무리들입니다. 그렇게 떠나 보낸 나를 여린 짐승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육신을 다 입고 나면 먼지가 되어 다른 일생의 틈으로 껴오기도 할 것입니다. 짐도 짐승도 먼지도 한 버스 안에서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그렇게 한시절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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