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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이파리 - 손택수

2011.01.01 14:41

윤성택 조회 수:698 추천:61


《나무의 수사학》/  손택수 (1998년 『한국일보』로 등단) / 《실천시선》185

        얼음 이파리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白碑)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감상]
영하의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접어 두었던 시집을 다시 펴보게 됩니다. 연못 얼음 바닥에 낙엽이 떨어져 붙어 있고, 그 낙엽을 화자인 내가 떼어내는 행위가 이 시의 마무리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수많은 의미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파리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내 ‘관계’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형상화랄까요. ‘백비(白碑)’는 글씨를 새기지 않고 세운 비석을 뜻합니다. 물과 낙엽이 한데 얼어붙어 그 문양을 품었으니, 말을 안으로 감춘 것이고 또 그 자체가 살점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지는 신비한 현상조차 이 시에서는 자연스러운 관계이며 소통입니다. 타인과 부대껴온 우리는 이 각박한 세상에 또 어떤 잎맥을 틔우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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