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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1.01.04 13:53

윤성택 조회 수:1054 추천:71


■ 조선일보

유빙(流氷)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 무등일보

외출을 벗다 ----------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각(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정류(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 영남일보 문학상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 경향신문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의 발화(發火).

* 조세희 작<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 부산일보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종(種)들이 많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 서울신문

새장 ----------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 동아일보

오늘의 운세 ----------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 한라일보

고사목 ----------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 국제신문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대(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 광주일보

어떤 소믈리에 ---------- 강혜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획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소믈리에: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 전북도민일보

모래내시장 ---------- 하미경

야채 썩는 냄새가 고소해지면
장터는 복숭아처럼 익는다
중고 가게 앞 내장을 비운 냉장고가
과일의 단내며 생선냄새며 땀내 들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일 무렵
은혜수선집은 벌써 불을 켜고 저녁의 한 모퉁이를 깁는다
박미자머리사랑을 지나면 몽땅 떨이라느니
거저 가져가라느니 농약을 치지 않은 다급한 말들이
등을 타고 내려 고무줄 늘어난 추리닝처럼
낭창낭창 소쿠리 속으로 들어간다
남들 보기 거시기 하다고 자식들이 말려도
팔 것들을 꾸역꾸역 보자기에 챙겨 나온 할머니는
돌아갈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지
빠진 이 사이로 질질질 과즙을 흘리며
복숭아 짓무른 데를 떼어 물고 오물거린다
문 닫는 속옷 가게에는 땡땡이무늬 잠옷이
잠들지 않고 하늘거린다 잠옷을 입고
늘어지게 자고 싶은 허리 대신
빈 바구니마다 어느새 어둠이 드러누웠다


■ 대구매일

1770호 소녀 ---------- 우광훈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소녀는 과묵하고 비밀스런 눈빛으로 책장만을 넘겨댄다. 별이 뜨고, 소녀는 마을 어귀 파피루스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 때론 우아하고 권위적인 무덤이 있는 이곳 오시리스 동물원으로 흘러든다. 바다표범도, 펭귄도, 사막여우도, 치타도, 판다도 없는 이곳에는 햇볕에 잘 그을린 허허로운 얼굴에 키 큰 금발의 코끼리가 있다.

  소녀는 향수어린 얼굴로 코끼리를 바라보다 석관 속에 놓인 접시저울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타조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그녀의 심장. 사육사의 경쾌한 신호음에 맞춰 코끼리가 저울 위로 올라선다. 똬리를 튼 비단뱀처럼 매끄럽게 내려앉는 그녀의 영혼. 순간 불꽃이 흩날리고, 파도가 울부짖고, 사자(死者)가 춤을 춘다. 기괴하고, 음울하며, 극도로 염세적인 그들만의 연극. 불멸을 향한 오래된 문명의 허망한 몸짓.

  나일강에 물그림자 드리우고, 피안(彼岸)에 다다른 소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목욕을 한다. 늙은 고양이처럼, 별과 달이 질 때까지

  그녀의 푸른 목덜미 아래로

  모래 이빨 자국만이 선명하다.

☆ 1770호 소녀= 1976년 맨체스터대에서 로잘리 데이비드 박사가 집도한 이집트 미라. 학자들은 방사능 분석을 통해 서기 105~405년 사이에 미라로 제작된 갈색 눈의 소녀로 추정하고 있다.


■ 문화일보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 세계일보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 강원일보

덩굴장미 ----------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 경남신문

마드리드 호텔 602호 ---------- 이재성

독한 럼주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급선원들이 돌아온 바다와
떠나갈 바다를 위해서 건배를 하는 사이
호텔 602호는 마스트를 세우고 바다 위에 떠있다.
아니 이미 항진 중인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허무, 낡은 시집의 행간, 해무는 같은 색이다.
점점 깊어지는 밤의 해무
수시로 무적이 길게 혹은 짧게 울리고
J는 아직 조타륜을 잡고 자신의 바다를 항해 중일 것이다. 조타실의 문을 열자
바다 속에서는 해독할 수 없는 안개가 타전되고
나는 이미 길을 잃은 한 척의 운명
해도를 펼쳐 북극성의 좌표를 찾는다.
J도 이 바다를 떠나 희망봉을 찾아 갔을 것이다.
스무 살, 바다를 잡을 때마다
늘 빈 손바닥이었다.
지금도 바다는 나에게 오리무중이다.
늙은 고양이가 친숙한 비린내를 풍기며
안개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안녕, 이 하룻밤도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안녕, 나도 사라질 것이다.
J가 누워 있던 침대엔
낡은 바다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번 항해가 길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무사히 귀항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드리드 항에서 이 호텔은
항해사들로 이미 만원이다.
하지만 이 호텔에는 602호는 없다.


■ 전북일보

오래된 골목 ----------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 한국일보

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끈 ---------- 정영희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집집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쌀 앉히는 소리로 마을이 저물면
밤이 이슥하도록 두런두런 눈이 내렸다
국화송이 같은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혈족들 하나 둘 모여 들고
풀 먹인 밤을 와시락와시락 눈이 내려
창호지 밖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시릉 위에 얹혀 있던 해묵은 이야기로
할머니 장죽에 담뱃불을 붙이시면
오촌 당숙은 18대조 할아버지 이야기로
눈내리는 장백산맥을 한 달음에 뛰어 넘고
엄마와 숙모는 치맛자락도 펄럭이지 않고
광으로 부엌으로 걸음이 분주했다
작은아버지는 밤을 치시고
흰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
먹을 갈아 지방을 쓰셨는데
타닥타닥 발간 화롯불 온기 속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조할배 다녀가시고
슬하에 자식 없던 증조 할매
눈물바람으로 다녀가시고
나이 열 여섯에 절손 된 집안에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
그 저녁에 떨어진 벌건 불화로에
다리 절룩이며 다녀가시고
눈이 까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밤
뒤란 대숲에는 정적이 한 자나 쌓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늘도 눈 푸른 열 여섯 살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들이
쿵쿵 계단을 밟으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 경인일보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 ---------- 오다정

달력 뒷장을 읽는다
무심한 세월이 쓰고 간
투명한 글씨 위 아버지
장강(長江) 한 줄기 그리셨다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
가보지 못한 세월 너머로
진진(進進), 언덕으로 포구로
그 어디 너머로 진진(進進)
화면 가득 띄우고도 모자라
반 토막만 남겨진 배

돛대도 물결도 반 토막이
된 자리, 아버지 또 그리신다
정직한 삼각형
한· 두· 세· 네
넘어보자 했으나 넘지 못했던
능선 뾰족뾰족 이어진다

빨갛고 검은 일력(日歷)의 뒷면
연습 없어 미리 살지 못한 세월로
열 두 척 반, 배 떠간다
아버지, 그려내신 한 장 그림
소실의 문자 빼곡히 박힌
발음되지 않는 국어책 같다


■ 경상일보

팔거천 연가 ---------- 윤순희

여름밤 내내 *팔거천변 돌고 또 돌았습니다 아직 물고기 펄떡이는 물 속 물새알 낳기도 하는 풀숲 달맞이꽃 지천으로 피어 십 수년째 오르지 않는 집값 펴지기를 깨금발로 기다리지만 대학병원 들어서면 3호선 개통되면 국우터널 무료화 되면 하는 황소개구리 울음 텅텅 울리는 탁상행정 뿐입니다

풀숲에서 주운 새들의 알 희고 딱딱한 것들 날마다 수성구를 향하여 샷을 날려 보내지만 죽은 알들은 금호강을 건너지 못하고 팔달교 교각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저 물새들 살얼음 낀 물속에서 언 발 교대로 들어 올렸다 내릴 텐데

환하게 타오르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의 불빛 온기는 어디까지 번져 갈 것인지요

물새들의 울음소리 팔거천 가득 울려 퍼지는 날 낮달 같은 새댁들 강변 가득 붉은  나팔 불며 여덟 갈래 꿈꾸며 비상 하겠지요.

(*팔거천 : 팔공산 자락에서 흘러든 여덟 갈래 물줄기가 합쳐져 대구의 강북인 칠곡 신도시를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하천,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달집태우기 행사를 한다.)


■ 불교신문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 전남일보

손톱 안 남자 ----------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 경제신춘문예 우수상

반가운 까치집 ---------- 박혜란

아침마다 삼촌은 머리에 까치집을 짓습니다
밤새 헝클어진 머리로 찾아온 까치 부리가 쿡쿡
노총각 정수리를 쪼고 갔던 것이지요
목과 팔이 늘어난 러닝셔츠를 주워 입고
연거푸 머리를 긁으며 수돗가로 가는 삼촌의 뒷모습은
어수룩하고 궁핍합니다

툇마루에 할머니는 속병이 난지 오래
보내 놓은 입사원서 소식이 궁금해지는 대낮까지
푹, 잠을 자다가 허연 배를 긁고 나오던 삼촌은
실업보다 실없게 웃는 걸 잘 한답니다
할머니 타박하는 소리가 딱. 딱. 정수리를 때리고
구르르릉, 구르르릉 전기 펌프에 물 차오르는 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삼촌 가슴 속까지 뻗어갑니다

베트남 처자라도 좋으니 젯밥 좀 얻어먹자고
일품 팔아 누추한 가계 좀 일으키라고
까치집의 까치가 바람을 모아 먹이를 물어 줍니다
순식간, 펌프로 차오르는 오래 고인 물처럼
한 가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삼촌 식도에서는 역류하는 쓴기침이 한참이지요

삼촌은 머리에 까치 한 마리 틀고 마당으로 걸어갑니다
할머니 걱정을 쓰락쓰락 밟고 뒷모습을 새겨갑니다
미워서 자꾸만 깊게 들리는 삼촌 발자국 소리가
까치 울음보다 더 손님 같은 대낮이 오고 있습니다
부스스한 정수리에서 까치도 까치처럼 잘도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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