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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 - 윤의섭

2011.01.05 10:08

윤성택 조회 수:693 추천:75


《마계》/  윤의섭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 《민음의시》 163

          조난

        겹잎처럼 소곤소곤 피어난
        영세 아파트 집집마다 전단지가 꽂혔다
        뿌리가 있는지 땅속부터 솟아난 금이 벽을 타고 굵은 가지를 펼쳤다
        옥상까지 오르고서도 모진 금은 계속 자란다
        웬만한 덩치는 들어서기 비좁은 어느 방구석에는
        심심풀이 화투판이 벌어졌다
        딴 돈으로 봄 되면 텃밭에 심을 쪽파 씨앗이나 사겠다고 열을 낸다
        차가운 바람이 텅 빈 놀이터에 볼일이 있는지 휘휘 감기는 늦겨울
        누렇게 바랜 베란다 유리창은 보일러 연통에 막혀 끝까지 열린 적 없고
        변기며 세탁기며 빗물이며 쏟아지는 물
        하루 종일 물관을 타고 지하로 빨려 간다
        처음 지을 때부터 사람 살라고 지은 구조물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난파된 우주선이 뜬금없이 지구로 추락한 건지도 모를 일
        환기구에서 프로펠러가 아무리 돌아도 아파트는 날지 않지만
        한 번도 살려 달라고 소리치지 않는 주민들
        성가시게 않게시리 떨어진 전단지 다시 문에 꽂아 놓고
        해마다 흰색 페인트로 금간 벽을 칠해
        한평생 살아도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우주나무 그려 놓고
        방범대 만들어 순찰 돌며 벽화를 지킨다 밤이면
        아파트 방마다 붉은 동백꽃처럼 조난등이 켜졌다
        찾아오는 이라야 재고품 봄을 파는 늦겨울 외풍뿐이다

        
[감상]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잔잔하게 영상이 흘러갑니다. 전단지 꽂힌 문틈, 금간 벽들, 동전이 오가는 노인들의 화투판, 배관의 물소리… 이 모든 것들이 ‘아파트’라는 하나의 생명체로 목격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식물이건 나무이건 혹은 우주선이건 낯설고 생경한 풍경들뿐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아파트 외벽에 보기 좋게 그려진 ‘나무’의 이미지에서 기인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벽화 그림을 지킨다는 발상과, 거기에 찾아오는 ‘봄’ 또한 재고품이라는 건, 문명 속에서의 '조난'이라는 비정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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