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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2001.04.19 11:13

윤성택 조회 수:2094 추천:292

게눈 속의 연꽃/ 황지우 / 문학과지성사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감상]
이외수가 그랬다지요. 기다림 만한 열병도 없다고. 또 어린왕자가 그랬다지요. 3시에 약속이면, 그전 12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고……. 이렇듯 기다림은 누구에게나 명치 끝 결리는 아련함을 제공합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아련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널 기다리다 못해 내가 너에게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마지막 연에서 묘한 희열을 느낍니다. 아니 나에게 이렇듯 명쾌한 해답을 제공한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눈 속의 연꽃' 시집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초판발행, 12쇄발행, 재판발행, 7쇄발행. 그러니까 시집이 나온 지 10년이 넘게 흐른 셈입니다. 10여 년 전 황지우는 나에게 어떤 화두로 감동을 붙잡아 놓는걸까요. 나는 10년 전 무엇이었으며 그 세월을 거스를만큼 이 시는 나를 왜 감동시키는 것일까요. 궁색한 독법으로도 읽히는 이 감동, 그것이 비단 이 시의 화두가 연인으로 한정되든 안되든 그의 언어의 조율과 긴장에 감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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