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창작과비평사, 1999
찬비 내리고
― 편지 1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감상]
찬비를 맞는 꽃송이들과 자신과의 조화를 이룬 시입니다. 울림을 주는 것은 단연 "당신이 힘드실까봐"입니다. 얼마전 모 시인을 통해 나희덕님의 근황을 알게 되었었는데, 이 시를 썼던 시점이 남편의 사업문제 등 심적인 부담이 큰 시기였다고 합니다. "당신이 아프실까봐" 마음껏 향기롭지 못하는 화자의 절절함이 꽃 피는 4월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