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선우 / 창작과비평사 2001
맑은 날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웅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꺾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감상]
굳이 두 개의 시를 연달아 '좋은시'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적잖이 놀란 것은 버려진 장롱를 꿰뚫는 시선에서였습니다.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의 부분이 그러한데, 낡은 장롱의 현존에서 그 근원까지 쫓아 올라가는 상상력이 좋습니다. 이 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맑은날"이라는 정서와 장롱과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돌팔매질당할 사랑"이라든가 "죽기 좋은 맑은 날"이라는 일탈의 충동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오늘 같이 맑은 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