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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18:00

윤성택 조회 수:949 추천:129

  『계단은 잠들지 않는다』 / 최을원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황금알 시인선 32》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아이는 오늘도 동네 쓰레기 태운 잿더미를 뒤진다
        한 움큼의 녹슨 못을 보물처럼 찾아들고
        자기 속으로 들어간다
        집 속에 또 집을 짓는다

        대문 밖에는 늘 아이의 엄마가 서 있다
        아이에게서 아이를 찾고 있다 아가야, 너를 만나러
        얼마나 많은 문을 지나왔는지 아니
        대문 두드릴 때마다 아이는 집 한 채 또 짓는다

        저 오랜 숨바꼭질도 언젠가 끝날 것이다
        대문 위에 대문을 덧대는 끊임없는 망치질 소리
        저 집이 완성되는 날,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문패 하나 내걸고 아이는 오래된 성(成)처럼 잠들 것이다
        떠돌이 바람이
        오고
        가고
        마른 풀 사이에 싸락눈이 쌓여갈 것이다

        
[감상]
자폐증에 걸린 아이의 심리와 ‘문’에 대한 직관적 묘사가 서늘하게 파고듭니다. 가령 1연의 사소한 ‘못’이 3연의 ‘망치질’로 연결되는 것이나, 심리적 닫힘 현상을 집 속의 집으로 표현한 것이 그렇습니다. 자폐란 흔히 인지 발달의 저하 등이 함께 나타나는 발달 상의 장애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이’를 장애로 보기보다는 아이가 하고픈 것에 대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관점이 이 시의 울림이 되는 부분이겠지요. 뇌의 보상효과라고 할까요. 자폐증 때문에 아이는 말문을 닫았지만, 실은 내면의 어떤 면에서는 풍부한 사고나 집중력이 잠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만든 ‘성(成)’은 이러한 쓸쓸한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긴 들판을 홀로 건너왔다/ 오랫동안 꼭 쥐고 있었던 손을 펴본다’는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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