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진은영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51
눈의 여왕
그녀에게서 훔쳐온 것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사물들은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다
부푼 보리씨가 자라고
청소용 트럭, 빨간 우체통 그리고 떠다니는 집들
자동차는 멈춰 있고
폐타이어들이 굴러다닌다, 내 애인의
유두처럼 까맣다
그런 아침 사람들은
칼날처럼 일찍 일어나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의 살해자를
찾으러 다닌다
바람에 묶인 흰 털들이 공중으로 도망친다
[감상]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저녁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높고 낮음이 없이 엎드려 그 흰 기별을 기다리는 것만 같습니다. 공평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눈은 모두에게 어울릴만한 외피를 지녔습니다. 눈의 여왕이 저기압의 구름에 있다면, 겨울은 끝없이 지상으로 눈을 훔쳐내는 운명을 어쩔 수 없습니다. 눈 속에서 자기 색을 유지하기 위해 오롯이 버티는 빨간 우체통, 혹은 아침 출근길 쌓인 눈을 날리며 달리는 자동차들의 바퀴. 사람들은 자줏빛 입술을 한 채 거리에 내몰리고. 하얀 곰가죽을 덮어쓴 날들이 내일쯤 모레쯤, 어느 갓길에서 발견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