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김소연/ 민음사(2006)
빛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감상]
추상은 실체의 정확한 파악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는 <그림자>에 대한 시각적인 관찰에서 상상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림자의 현존이 쓸쓸한 그늘로 체감되는 건,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이라는 의인화에 진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관념과 말로 운용되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져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추상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분명한 건 발견이 의식을 확장시킨다는 점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던 그 영역에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는 진실이 꿰뚫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