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태준 / 『시와시학』 2002년 가을호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세상 한 곳 한 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이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암내가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감상]
시골 저녁 풍경을 회화처럼 소묘한 시입니다. 세상 것들이 말을 한다라는 설정은 의인법으로 인간사를 조명하는 것인듯 싶습니다. 가장 좋은 표현은 아무래도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입니다. 육십촉 전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필라멘트가 마치 외이(外耳)의 모양을 닮았습니다. 그 전구가 켜지는 것을, 어둠의 귀를 터준다라니요, 어둠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그러나 낯설게 표현한 것이 잔잔하게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