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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 박이화

2003.01.08 15:51

윤성택 조회 수:1072 추천:172

「폭설」 / 박이화 / 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폭설

 
        밤새 보태고 또 보태어 쓰고도
        아직 못다한 말들은
        폭설처럼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 그리움에 첩첩이 막혀
        더 갈데 없는 곳까지 가 볼까요?
        슬픔에 푹푹 빠져 헤매다
        함께 눈사태로 묻혀 버릴까요?
        나 참 바보 같은 여자지요?
        눈오는 먼 나라 그 닿을 수 없는 주소로
        이 글을 쓰는 난 정말 바보지요?
        그래도 오늘 소인까진
        어디서나 언제라도 유효하면 안 될까요?
        끝없이 지루한 발자욱처럼 눈발,
        어지럽게 쏟아지는 한 길가
        빨갛게 발 시린 우체통이
        아직 그 자리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군요
        한편에선 쿨룩이며 숨가쁘게 달려온 제설차가
        눈길을 쓸고 거두어 위급히 병원 쪽으로 사라집니다
        아, 그렇군요
        내 그리움도 이렇게 마냥
        응달에 쌓아 두어선 안 되는 거군요
        아직 남은 추위 속에
        위험한 빙판이 될 수 있겠군요
        슬픔에 몸둘 바 몰라
        저 어둔 허공 속 지치도록 떠도는 눈발처럼
        나, 당신 기억 속에 쌓이지 말았어야 했군요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랑이 전부이고 다인 나에게는
        해마다 어디로든 추운 겨울은 오고
        큰 눈 도무지 그치지를 않네요


[감상]
하염없이 내리는 폭설을 여인의 심경으로 비유한 시입니다. 각 행마다 미묘한 심리가 잘 드러나 있고,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성찰로 이어지는 흐름이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 중 하나는 '더 갈데 없는 곳까지 가 볼까요?'라는 일탈적 상상력으로 삶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됨으로서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거기에서 우러나는 감동을 전달받게 되고요. 깨끗한 시혼은 이처럼 온몸으로 시적 대상과 밀착된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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