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길상호/ 『시와정신』2002 겨울호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감상]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집 밖 오동나무와의 관계를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잔잔하게 그려집니다. 나이테가 우물의 파문처럼 여기게끔 하는 상상력도 눈여겨볼만 하고요. 오동나무 그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인의 감성,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