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거리/ 조재영/ 199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그리움의 거리
내 메마른 정원에 비를 몰고 우연처럼 당신이 왔었네
그때 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빗줄기에 내 정원이 맑게 씻기는 것만 바라보았네
당신이 다시 우연으로 떠난 후였을까 어느 날인가부터
내 가슴 한켠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네
비가 그칠 무렵, 나무들이 푸른 눈을 뜰 무렵
나는 알았네 당신이 내 가슴에
녹슨 그네 하나를 걸어두고 갔다는 걸
나는 그네 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네 줄을 움켜쥐고 바르르 떨면서
작은 흔들림에도 겁먹은 채 이렇게 매달려 있네
그네줄이 흔들리는 폭만큼, 그 속도와 깊이로
내 위태로운 시간도 깊어가네
당신에게 닿을 수 없는 이 그리움의 거리
나는 그네 위에서 발을 한번 굴러보네
웃는 것 같고 또한 우는 것 같은 이 生의 삐걱임 소리
당신이 내 가슴에 걸어두고 간 이 길고 긴 침묵의 소리
그네줄이 닿지 못하는 당신과 나 사이 꼭 그만큼의 거리에
오늘은 서늘한 조각달 하나 물음표처럼 걸려 있네
서쪽으로 서쪽으로 천천히 흐르더니
어느새 내 정원의 푸른 나무 한 그루
당신 쪽으로 옮겨놓고 있었네
내 가슴의 그네 하나, 위태롭게 매달려
녹슨 시간을 바라보고 있네
[감상]
20여 년이 지나도 '우연처럼'이라는 말이 참 새롭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처음 그네를 타보았을 때의 설레임 같은 느낌들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옮겨가 삐걱이며 흔들립니다. 뜻하지 않게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일테지만, 이처럼 운명적인 발설이 또 어디 있을까. '내 정원'이라는 시적 공간이 자꾸만 눈길에 머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