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리움의 거리 - 조재영

2002.06.17 13:54

윤성택 조회 수:1350 추천:201

그리움의 거리/ 조재영/ 199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그리움의 거리

        내 메마른 정원에 비를 몰고 우연처럼 당신이 왔었네
        그때 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빗줄기에 내 정원이 맑게 씻기는 것만 바라보았네
        당신이 다시 우연으로 떠난 후였을까 어느 날인가부터
        내 가슴 한켠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네
        비가 그칠 무렵, 나무들이 푸른 눈을 뜰 무렵
        나는 알았네 당신이 내 가슴에
        녹슨 그네 하나를 걸어두고 갔다는 걸
        나는 그네 타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네 줄을 움켜쥐고 바르르 떨면서
        작은 흔들림에도 겁먹은 채 이렇게 매달려 있네
        그네줄이 흔들리는 폭만큼, 그 속도와 깊이로
        내 위태로운 시간도 깊어가네
        당신에게 닿을 수 없는 이 그리움의 거리
        나는 그네 위에서 발을 한번 굴러보네
        웃는 것 같고 또한 우는 것 같은 이 生의 삐걱임 소리
        당신이 내 가슴에 걸어두고 간 이 길고 긴 침묵의 소리
        그네줄이 닿지 못하는 당신과 나 사이 꼭 그만큼의 거리에
        오늘은 서늘한 조각달 하나 물음표처럼 걸려 있네
        서쪽으로 서쪽으로 천천히 흐르더니
        어느새 내 정원의 푸른 나무 한 그루
        당신 쪽으로 옮겨놓고 있었네
        내 가슴의 그네 하나, 위태롭게 매달려
        녹슨 시간을 바라보고 있네



[감상]

20여 년이 지나도 '우연처럼'이라는 말이 참 새롭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처음 그네를 타보았을 때의 설레임 같은 느낌들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옮겨가 삐걱이며 흔들립니다. 뜻하지 않게 일어난 것에 대한 것일테지만, 이처럼 운명적인 발설이 또 어디 있을까. '내 정원'이라는 시적 공간이 자꾸만 눈길에 머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271 목포항 - 김선우 2002.07.22 1222 209
270 월식 - 최금진 2002.07.19 1302 187
269 형상기억합금 - 이혜진 2002.07.16 1098 202
268 페인트공 - 손순미 2002.07.15 1160 172
267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 한혜영 2002.07.12 1058 176
266 봄날 - 신경림 2002.07.11 1629 176
265 구부러진다는 것 - 이정록 2002.07.09 1111 174
264 산수유꽃 - 신용목 2002.07.08 1179 170
263 사슴농장에 대한 추억 - 윤의섭 2002.07.05 1021 187
262 寄生現實(기생현실) - 김중 2002.07.04 1126 215
261 가스관 묻힌 사거리 - 최승철 2002.07.02 1075 186
260 일몰 - 홍길성 2002.06.28 1156 188
259 지금은 꽃피는 중 - 류외향 2002.06.27 1246 179
258 다대포 일몰 - 최영철 2002.06.26 1007 180
257 강풍(强風)에 비 - 김영승 2002.06.25 1062 171
256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2002.06.24 1020 162
255 망설임, 그 푸른 역 - 김왕노 2002.06.20 1153 174
254 꽃나무와 남자 - 조정인 2002.06.19 1167 198
253 이장 - 한승태 2002.06.18 1094 226
» 그리움의 거리 - 조재영 2002.06.17 1350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