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와 남자/ 조정인/ 『현대시 2002』
꽃나무와 남자
별들 옛집 주소를 들고 기웃대던 늙은 겨울이
어린 봄의 혀 위에
이는 내 몸! 하고 연둣빛 밀떡을 올려놓네
남루한 외투 밑에 숨겨온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이 마른 가지에 옮겨 붙어
촛농처럼 골똘히 맺힌 꽃망울들
꽃망울 벙글어
흰 빛에 분홍 그늘이 물든 생각의 미열이 엿보이네
느리게 뒤척이는 꽃가지
나무 안에 점차 종소리 번지네
먼발치 나무는
한 길도 넘는 제 외로움에 발을 담그고
하늘로 목을 치어드네
나무 아래는 빛과 그늘이 누덕누덕 기워놓은 걸인 하나
얼굴에 온통 꽃 그늘로 화상을 입은 그가 미간을 모으자
주유소가 있는 풍경이 당겨지고
발 아래 흥건한 그늘이 수런대기 시작하네
남자를 향해 꽃가지 뻗어가네
그는 창 안으로 목을 들이미는 기린 꿈을 꾸는 중이네
나무는 훅 불어 끈 양초처럼 적막하게 서 있네
공원 벤치에서 문득 지워진
별이 된 자들
나무들에게 올이 성긴 흰 스웨터를 나누네
성탄 전야, 나무 아래는 누군가 별을 헤다 간 발자국 있네
[감상]
화장실에서 이 시를 읽었습니다. 시가 마려운 심정 때문이었을까. 문장마다 매달아 놓은 장식이 주렁주렁 탐스럽습니다. 어쩌다 詩가 나의 손금나무에 매달렸을까. 좋은 시는 볼화장이 예쁜 사과처럼 정신의 과육이 풍부합니다. 이 시는 언어를 다루는 재미가 쏠쏠하고 주유소, 나무, 겨울 등의 시적 공간에서 은유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습니다. 화장실에서 이 시를 읽고 나서, 가만히 접어 표시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