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 홍길성/ 제3회 『시산맥상』 수상작
일몰(日沒)
하루의 소임을 다하고 돌아와 아버지
그늘이 되어 누우신다 늙은 소잔등의 털처럼 늘어져
참나무 목침을 괸 머릿발이 희끗하다
갚지 못한 대출금 연체이자처럼 흰머리는 곱절이나 늘었다
눈앞이 어둑하신지 아버지 무언가를 더듬으신다
휭하니 달려가 알전구를 켜니
몸 세워 잎담배를 마는 아버지 손톱 밑이
까맣다 추곡수매 거절당한 나락들
보듬고 쓰다듬으셨는가보다
언젠가 내가, 몹쓸게 도회지를 돌다 돌아왔을 때
보듬어 등 토닥거려주셨듯이,
버릴 것 버리지 못하고 다시 품는
그 자리에 누워 듣는 아버지의
코골이가 아득하다 언제나 나는
먼발치서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머리맡에 놓여
변제를 독촉하는 서문(書文)을 보니 앞일이 캄캄하다
아버지는 곧 차압당하실 것이다 돌아 올 길을
잃어버리고 그만, 저 꿈길에서
내일은 알전구의 촉수라도 높여야겠다
아버지 걸어오실 저 고샅길까지도 다, 환하게
[감상]
이 시는 삶의 황혼에 도착하신 아버지의 삶을 진솔하게 담고 있습니다. 자연의 것들을 키워내며 살아가시는 모습과 농가부채에 대한 잔잔한 접근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의 어두운 눈에서 알전구의 촉수로 이어지는 화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울림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세월을 거치신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저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몰 후에 아버지를 위해 화자가 켜는 알전구. 그 마음에 시골 아버지의 밤은 환한 산수유열매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의지가 詩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