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다는 것/ 이정록/ 제13회(2002) 김달진 문학상 수상작
구부러진다는 것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감상]
고추 꼭지에서 이렇게 상상력이 전이된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 시는 자연의 소소한 현상조차도 울림으로 바꿀 수 있는 발견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부러져서 미안하다. 나를 데려온 세월아.